가수 현미의 생애 : 그녀의 출생과 영결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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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현미의 생애 : 그녀의 출생과 영결식까지

by InsightMan 2023. 4. 27.

가수 현미는 1938년 1월 28일에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원래는 출생지였던 강동과 평양에서 살았으나 한국전쟁이 한창 전개되던 1951년에 1.4 후퇴를 계기로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월남 후, 1957년 미8군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공연에 불참한 여가수의 대타로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가수 현미

 

1962년에 이봉조가 냇 킹 콜의 It's A Lonesome Old Town을 개사, 편곡한 밤안개라는 곡으로 가요에 정식 데뷔하였습니다. 이 곡을 통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보고 싶은 얼굴이라는 곡을 불러 이산가족 상봉이 한창이던 당시 그들의 아픔을 노래로 달래주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표 여성 가수로서의 활약

1960년대에는 패티 김, 이미자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 여성 가수로서 인지도를 넓혀갔습니다.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을 줬고 그때부터 팝과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불렀습니다. 이봉조의 노래만 불렀던 현미는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가수 현미의 영결식

가수 현미의 영결식은 4월 11일 오전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엄수되었습니다. 영결식 사회는 코미디언 이용식이 맡고, 이자연 대한가수협회장이 조사를 낭독하였습니다. 후배 가수 박상민과 알리는 추도사로 고인의 뜻을 기린다. 영결식에서는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가 조가로 흘러나왔습니다.

 

영결식에는 현미의 두 아들 이영곤과 이영준, 그리고 둘째 며느리 원준희와 조카 노사연, 한상진 등 가족과 친지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패티 김, 이미자, 남진 등 원로 가수들과 박상민, 알리 등 후배 가수들도 고인을 위로하고 조문하였습니다.

 

현미의 장남 이영곤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혼자서 가신 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자식이 둘이나 있고, 식구들이 많은데 혼자서 말없이 가신 것에 대해서는 평생 불효로 남을 것이다. 평생 못 씻을 불효다" 라며 죄스러운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현미의 차남 이영준은 "어머니께서는 항상 밝고 긍정적인 분이셨다. 어머니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행복하게 살아가셨다. 어머니께서는 저희에게도 항상 힘이 되어주셨고, 저희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셨다"라며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현미의 유해는 영결식 이후 국내가 아닌 두 아들이 거주하는 미국으로 모셔져 안치될 예정입니다.

가수 현미의 음악적 업적과 영향력

가수 현미는 한국 가요계에서 지대한 업적과 영향력을 남긴 가수입니다. 그녀는 재즈풍의 보컬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한국의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미8군 무대에서 익힌 재즈풍 창법으로 '한국형 팝'을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박재란, 위키리 등과 같이 60년대 톱가수로 활동하였으며, 음악계에서는 이미자, 패티 김과 비슷한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는 대가수에 해당합니다. 그녀는 작곡가 이봉조와 짝을 이뤄 숱한 인기곡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밤안개', '무작정 좋았어요',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은 현미의 대표곡으로 꼽힙니다.

 

이 노래들은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잘 드러내주었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밤안개'는 1962년 발표된 번안곡으로, 현미의 정식 1집 앨범이자 첫 번째 히트곡입니다. 이 노래는 '밤안개가 가득히 / 내 마음을 감싸고 / 널 잊으려 애쓰다 / 또 널 그리워하네'라는 애절한 가사와 함께 현미의 독특한 음색이 인상적인 곡입니다.

 

현미는 노래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도 활약하였으며, 따뜻한 성품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1997년 KBS 인터뷰에서 \"저희가 데뷔하기 전에는 전통적인 우리 가요라고 그러죠, '트로트'. 우리가 스타트를 '팝에 가까운 가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그녀는 2000년대에도 신곡을 발표하고 무대에 서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실향민이 되어 가족과 생이별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1998년에 어렵게 재회한 여동생과 한번 더 보고 싶단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작곡가 이봉조와 현미의 관계는 결국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이혼의 원인은 이봉조의 바람이었습니다. 이봉조는 가수 김추자와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나고, 현미에게 결별 선언을 했습니다. 현미는 이봉조를 본부인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이혼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현미는 이봉조를 사랑했고, 그를 잃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혼 후에도 현미와 이봉조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1987년쯤 이봉조가 다시 현미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건강이 많이 악화된 모습이었습니다. 이봉조는 현미에게 자신과 다시 살자고 애원했지만, 현미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현미는 여전히 그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1988년 이봉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현미는 그의 연애편지와 서예 작품을 액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현미는 가수로서의 삶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2000년대에도 신곡을 발표하고 콘서트를 열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2007년에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 'My Way'를 개최하고, 2012년에는 53번째 앨범 '밤안개'를 발매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과 음악에 대해 \"내가 살아온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산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노래도 부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실향민이 되어 가족과 생이별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1998년에 어렵게 재회한 여동생과 한번 더 보고 싶단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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