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삶과 전투 <명장의 일대기를 되짚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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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삶과 전투 <명장의 일대기를 되짚어보다>

by InsightMan 2023. 3. 18.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의 영웅이자 조선해군의 명장으로, 그의 삶과 전투 업적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 정신과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 글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초기 인생과 군인 생활, 전략가로서의 업적, 거북선의 개발, 임진왜란 동안의 명량해전과 묘량해전, 국가의 위기 속에서의 활약, 옥포해전과 사천포해전, 논산대첩과 한산도대첩, 그리고 그의 순국과 유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충무공 이순신

 

초기 인생과 군인 생활

 
이순신은 1545년 경상도 거제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정은 관직을 맡은 뒤 경상도 전라도에 이주하였고, 이순신 역시 그의 아버지를 따라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젊은 시절부터 군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568년,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군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576년, 이순신은 전라도 좌수영사로 진급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해상 전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조선 해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순신은 당시의 군사 체계와 전술 지식을 충분히 습득했으며, 전쟁의 역사와 전략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했습니다.

 

15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순신은 해군의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해군의 전술과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조선 해군의 지휘체계와 전술에 혁신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이순신은 조선 해군을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군대로 키웠습니다.

 

1591년, 이순신은 전라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전라도 해군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임무를 맡은 동안 조선 해군의 전술과 전투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더욱 높였습니다.

 

전략가로서의 이순신

 
이순신은 조선시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전략적 사고와 지휘력 덕분에 임진왜란 동안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의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역량은 전투와 전쟁에서 맹활약한 것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의 놀라운 전략은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해군은 강력한 전력과 무시무시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난처한 상황에서도 독특한 전략을 펼쳐 일본 해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표적인 전략 중 하나는 조선 해군이 적의 배를 들어올리고 무장해제한 후, 이를 습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술은 일본 해군에게 큰 충격을 주며 그들의 전쟁욕구를 꺾었습니다. 다른 유명한 전략으로는 원거리 포격전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함포가 일본 함포보다 사거리가 길다는 점을 파악하고, 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포격하여 손상을 입히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방법으로 옥포 해전 , 합포 해전 , 사천 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또 다른 창조적인 전략으로는 화준구미 (火船九枚)가 있습니다. 화준구미는 9척의 배에 연료와 폭발물을 싣고 적함에 부딪혀 자살공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당항포 해전 에서 일본 수군 50여 척을 격파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이순신 장군은 적과 아군의 상황과 지형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여 최적화된 배치와 움직임을 계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산도 대첩 에서는 적함이 바다로 나오기 어려운 좁은 수로에 유인하여 포위 공격하였으며, 명량 해전 에서는 자신들보다 많은 적함들이 서로 부딪치게 하여 혼돈스럽게 만든 후 공격하였습니다.

 

거북선의 개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거북선이라는 이름의 군함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태와 구조는 임진왜란 때의 것과 다른 모양입니다.

1591년,

이순신 장군은 전라 좌수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1592년 3월 27일,

이순신 장군은 최초로 건조된 세 척의 거북선을 진수식 합니다.

 

1592년 5월 29일,

이순신 장군은 사천 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하여 일본 해군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이순신 장군은 여러 번의 해전에서 거북선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일본 해군에게 크게 손상을 입힙니다. 특히 명량 해전에서는 13척의 배 중 여덟 척이 거북선이었습니다.

 

1597년,

원균회담에서 치러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배하고 모든 거북선이 침몰합니다.
 

국가의 위기 속에서의 활약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순신은 국가의 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그는 전쟁 중 왕과 정치권력의 갈등에도 굴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이순신의 활약은 조선의 국가 안보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쟁 초기에 왜군이 한양까지 침입하고 선조가 피난을 가게 되자, 이순신은 전라도 수군을 이끌고 남해안에서 왜군과 맞섰습니다. 그는 거북선과 함포를 활용하여 옥포대첩 , 당항포대첩 , 안골포대첩 등에서 연승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한산도대첩 에서는 적함 133척 중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포로로 잡아내는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아있는 명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당시 붕당간의 갈등으로 인해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경상도 관찰사 원균은 이순신과 반목하면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으며, 서인이라는 비밀조직은 조정에서 이순신을 명예모독하는 비방글을 흩뿌렸습니다3. 결국 선조는 원균의 제소를 받아들여 이순신을 체포하고 사형 집행 직전까지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다시 침략하기 시작하자(정유재란), 선조는 죽음 직전까지 백의종군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때 남아있던 조선 수군은 병선 12척, 병사 120여 명뿐이었습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포기하지 않고 명량해전 에서 적함 333척 중 31척을 격침하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에서도 크게 승리하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숨져버렸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라고 육성하여 부름받았다고 합니다
 

 

마무리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의 영웅으로 그의 업적과 헌신은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국가 정신과 민족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의 지혜롭고 용감한 전략은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조선의 위기를 구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하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국가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민족의 영웅으로서 그의 기록이 후세에 전해지며 우리들에게 영감과 자존감을 선사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헌신적인 삶과 용맹한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출처:

이순신 기록물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 (http://www.nl.go.kr)
한국사 전통시대 - 김완 (문학동네, 2011)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 유승용 (돌베개, 2004)
임진왜란과 이순신 - 김명준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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