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죽음 이후의 노동운동과 사회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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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전태일의 죽음 이후의 노동운동과 사회 변화

by InsightMan 2023. 4. 15.

1970년 11월 13일, 서울 종로구 평화시장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의 봉제공장 노동자였다. 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죽음을 택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시달리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각성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와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태일의 죽음과 노동운동,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사회변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의 죽음과 노동운동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17세 때 상경하여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근로기준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법률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법률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혼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공장에서 법률 위반 사항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공장주들과 경찰의 반감을 사고, 폭력과 억압에 시달렸다. 그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계속 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공장에서 나오는 재단물에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을 적어 붙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근로기준법 전문과 함께 시위를 하려고 했지만, 경찰에게 막혔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말하며 분신한 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죽음은 당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시달리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각성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와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태일의 죽음과 사회 변화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기폭제인 동시에 한국 사회 흐름을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73년 신진자동차 (현 GM대우),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 동일방직 노조도 잇따라 결성됐다.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과 경찰의 노조 조합원 ‘블랙리스트’ 관리 등 극심한 노조 탄압 속에서도 70년대에만 2500여 개의 노조가 생겨났다. 79년 노조 조합원 수는 100만 7000여 명까지 늘어났다.

 

전태일의 죽음은 ‘대학생 친구’들에게도 깊은 충격을 던졌다. 한자로 가득한 근로기준법과 씨름하면서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다면…”이라고 탄식한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대학생들의 시선을 노동현장으로 향하게 했다.

 

대학마다 전태일 추도식과 항의집회를 열었다. 군사독재 반대와 농민문제에 주로 천착하던 학생들은 노동문제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민주화 요구와 맞물려 종교인, 지식인 등 재야 민주세력들의 연대 활동도 활발해졌다. 정치권에서도 정부의 노동정책에 항의하며 노동문제를 ‘정치문제화’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연대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투쟁과 결합되면서 한국 사회 진보진영의 큰 축을 이루게 됐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동운동은 또 한 번 침체기를 맞았다. ‘노동조합 정화조치’와 노동관계법 개정으로 인해 70년대 전태일이라는 씨앗에서 자란 민주노조운동은 급속히 위축됐다.

 

대학생 위장취업자에 대한 사법조치도 진행됐다.

이런 과정에서도 노동계는 84년 최초의 동맹파업인 서울 구로공단 파업을 통해 하나로 결집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특히 87년 6·29 선언 이후 노동자들은 다양한 요구조건을 걸고 노동조합 결성과 투쟁에 나섰다. 그해 6월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발생한 노동쟁의만 총 3311건에 이르렀다. 결국 민주노조운동은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함으로써 결실을 맺고 한국노총과 함께 양대노총 시대를 맞게 됐다.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영웅이자 성인이다. 그는 또한 한국 역사와 문화에 큰 자취를 남겼다.

 

그의 죽음은 영화, 드라마,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 씨는 아들의 유품인 근로기준법 전문과 함께 노동운동에 참여하며 전태일 재단을 설립하고, 전태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그의 이름은 여러 곳에 기리고 기념되고 있다. 전태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그는 우리에게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의 정신을 남겼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적 약자와 억압받는 이들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마음을 남겼다. 그는 우리에게 정의와 진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는 용기를 남겼다.

 

전태일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것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있다. 그리고 그가 꿈꾸었던 것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전태일이 남긴 것들을 잊지 말고, 그가 꿈꾸었던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치며

전태일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것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있다. 그리고 그가 꿈꾸었던 것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전태일이 남긴 것들을 잊지 말고, 그가 꿈꾸었던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출처

  • [1] 전태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2] [왜 다시 전태일인가]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것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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