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 그의 인생과 기업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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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 그의 인생과 기업가정신

by InsightMan 2023. 4. 14.

 

현대그룹의 초대 회장인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01년 당시 현대그룹의 가치는 30조 원이었다. 정 회장의 일대기와 기업가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어린 시절부터 창업, 성공, 위기, 통일운동, 정치진출 등 그의 인생과 기업가정신을 살펴보겠다.

 

정주영 회장의 생전 모습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

어린 시절의 정주영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현 북한)에서 태어났다. 정주영의 호인 아산은 고향 아산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 (15세)하는데 가난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진학은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기 시작한다.

 

하지만 농사일로는 가난을 못 벗어난다고 생각해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한다. 동네 면장 집에 배달된 신문을 몰래 훔쳐보다가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무작정 가출을 감행한다. 여러 번 가출을 했으며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는데, 서울에서 경리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번번히 아버지에게 잡혀 다시 끌려가게 된다. 아버지는 너는 장남이니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다시 가출을 한다. 결국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서울에서의 성장

서울에 정착해서는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는데, 배달원 자리가 돈이 꽤 되어서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자 월급이 쌀 20 가마가 되었다. 경리 공부를 해서인지 정주영은 수익을 계산하는 등의 회계일을 했는데, 이로 인해 쌀가게 주인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

 

복흥상회 주인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여자에 빠지고 술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터라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준다. 1935년 (20세) 변중석 여사와 선을 보는데 변중석 여사는 총각이 서울에서 선을 보러 왔다는 말에 무서워서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고, 결국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못 보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1938년 (23세) 가게를 물려받고 경일상회라는 이름을 짓는다. 하지만 2년 만에 중일전쟁이 터지며,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이 한국 미곡통제령을 내려 곡식거래가 금지되면서 가게를 닫게 된다. 하지만 가게가 망했다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정도 생겼기에 일을 해야만 했다.

 

1940년 (25세)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의 소개로 자동차 정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쌀가게 단골이었던 오윤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3000원을 빌려 망한 자동차 수리공장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한다. 이때 당시만 해도 자동차는 수리기간이 상당히 길었는데, 정주영은 다른 수리점보다 빨리 자동차를 수리해 준다고 하여 정비소는 대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공장에 화재가 일어나 아루아침에 다 타버려 거지신세가 된다. 오윤근이라는 사람은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한 번에 떼인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돈이 없어진 정주영은 돈을 빌렸던 오윤근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고 이야기한다.

 

오윤근도 정주영의 패기와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다시 빌려주고 정주영은 신설동에 다시 자동차 수리공장을 설립해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빚도 다 갚게 된다.

 

시기 나이 주요 사건
서울 정착, 복흥상회 배달원 취직  
  • 월급: 쌀 20가마 (3년 후)
  • 회계일: 쌀가게 주인이 마음에 듦
1935년 20세
  • 변중석 여사와 결혼
  • 복흥상회 주인이 가게 물려줌
1938년 23세
  • 경일상회 창립
  • 중일전쟁으로 인해 가게 폐업
1940년 25세
  • 자동차 정비 관심
  • 아도서비스 인수
  • 대성장을 이루다 화재로 공장 파괴
재기  
  • 오윤근에게 다시 돈 빌림
  •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 설립
  • 상당한 재산 모으고 빚 다 갚음

 

자동차 제조의 꿈

정주영은 자동차 제조의 꿈을 품고 여러 방면으로 시도를 하였다. 1950년 (35세)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다시 망하게 되지만, 정주영은 미군의 수송대장으로 취직하여 전쟁 중에도 돈을 벌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재건하고, 1955년 (40세) 국내 최초로 트럭인 '현대호’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트럭은 외제 부품을 조립한 것이라서 완전한 국산화는 아니었다. 정주영은 완전한 국산화를 위해 부품 제조업체들과 협력하려고 했지만, 당시에는 부품 제조업체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부품 제조업체들을 직접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1958년 (43세) 현대건설을 설립하고, 1961년 (46세) 현대중공업을 설립한다. 이렇게 부품 제조업체들을 창출하면서 자동차 제조의 기반을 마련했다.

 

현대그룹의 성장

정주영은 자동차 제조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 분야에도 진출하였다. 1973년 (58세)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대의 조선소인 울산조선소를 건설하고, 1974년 (59세) 세계 최초로 260,000 톤급 석유운반선인 '현대유니버스’를 건조하였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세계적인 조선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76년 (61세) 현대건설은 중동에서 건설사업을 확장하고, 1980년 (65세) 중동에서 가장 큰 인공섬을 건설하였다. 이후 현대건설은 세계적인 건설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83년 (68세) 현대전자를 설립하고, 1986년 (71세)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협력하여 컴퓨터칩을 개발하였다.

 

 

정주영의 인생과 기업가정신

정주영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서 세계적인 기업인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공부하고 협력하였다. 그는 또한 사회적 책임과 통일의식을 가지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국제적 위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인생과 기업가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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