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업적 : IMF, 오부치 선언, 남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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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업적 : IMF, 오부치 선언, 남북 문제

by InsightMan 2023. 4. 7.

이 포스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업적을 살펴보겠습니다. IMF 위기를 돌파하고 오부치 선언으로 일본 관계 개선, 그리고 남북문제 해결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확인하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역동적인 생애와 정치입문, 대통령 시절의 IMF 위기 극복 및 오부치 선언 등을 다룬 포스팅입니다. 한국 역사의 중요 인물을 만나보세요!
김대중

 

출생

1924년 1월 6일에 전라남도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따로 살아서 어머니 집과 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항일 의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유명했고, 김대중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적, 김대중이 엿장수의 담배를 훔쳤는데 어머니가 알고 나서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그때부터 김대중은 옳고 그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년기에 학교를 다닐 기회가 없어 서당에서 배웠고, 목포로 이사한 후 목포 제1공립보통학교에 다녔습니다. 이후 1939년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고, 16살 때 일본식 이름인 도요타 다이추로 개명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계속해서 학업에 전념하려 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결국 해운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김대중은 목포 상선 합동 조합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5년 8월 19일 선 정부구성론을 주장한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져 공산주의계열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활동했으나, 얼마 안가 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한국민주당원이었던 장인의 도움으로 목포파출소 습격사건에서 풀려났습니다.

 

1946년 여름에 좌익과 결별한 김대중은 1947년 목포해운공사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50~70톤 선박 여러 척을 가지고 있었죠.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되자,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처형을 면했습니다.

 

김대중은 공산당원들에게 감금되었지만 탈출하여 은둔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이 기간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강화했습니다. 1946년 여름에 좌익과 결별한 김대중은 1947년 목포해운공사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50~70톤 선박 여러 척을 가지고 있었죠.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되자,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처형을 면했습니다.

 

김대중은 공산당원들에게 감금되었지만 탈출하여 은둔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이 기간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강화했습니다. 1950년 10월부터 김대중은 선박 두 척을 수리하여 사업을 재개했고, 목포일보를 인수해 1952년 3월까지 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인적·물적 여건이 부족했지만, 김대중은 직접 취재를 나가고 사설을 작성했습니다.

 

이때 길러진 습관은 그의 정치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6.25 전쟁 당시 김대중은 목포 해상 방위대에서 복무했다고 주장하지만, 해군본부에서는 이와 관련된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포경비부의 연혁사에서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를 통해 해군에 협력한 민간 의용대 성격의 조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치 입문

 

장인의 추천으로 한민당에 입당한 김대중은 시당 상무위원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김대중은 해운 회사와 신문사를 운영하며, 농민, 근로자, 실업자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1956년 민주당에 입당했습니다.

 

그때 김대중은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1957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명은 영국 정치철학자 토마스 모어였습니다. 이후 김대중은 목숨을 건 정치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김대중은 여러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았고, 장면 전 국무총리가 1960년 김대중을 대변인으로 발탁하여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인제군 선거에서 김대중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지만, 이틀 후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됩니다. 1962년 이희호와 재혼한 후, 1963년 목포시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한일기본조약 협상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964년, 김대중은 한일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 정치 자금으로 사용된 돈에 대해 폭로한 김준연 의원의 구속 동의안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사용했습니다.

 

그의 연설로 구속 동의안 처리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김대중은 정계에서 주목받게 되었고, 당내에서도 입지를 넓혔습니다.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1970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며, 결국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됩니다. 김대중은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 선거라 했으나, 두 주장 모두 현실이 됩니다.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밀착경쟁을 펼친 김대중은 강력한 도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민당 내부에서는 유진산과의 갈등이 있었고, 김대중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습니다. 이 사고의 배후에는 정권의 개입이 의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신민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전하며 의석을 크게 늘립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은 1년 뒤 유신을 실시하게 됩니다.

 

1972년 교통사고 치료를 위해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유신 소식을 듣고 망명을 결정합니다. 일본과 미국에서 반유신 투쟁을 벌였으나, 1973년 납치되어 가택 연금에 처했습니다. 가택 연금 중 반유신 투쟁을 이어가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후 5년 형을 받았고 감옥 대신 서울대병원에 감금되었으며, 아내 이희호의 이감 신청으로 감금 상태가 악화됩니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후 가석방되고, 국민 연합 구성 및 김영삼을 신민당 총재로 지지했습니다. 1979년 유신체제 몰락과 함께 김대중의 가택 연금이 해제됩니다. 1979년 12월 9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면서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습니다.

 

김대중은 이후 김종필과 김영삼과 함께 대권 주자로 급부상했지만 정치 세력들이 합치지 못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 세력'이 권력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1980년 4월, 김대중은 한국신학대학과 동국대 강연에서 유신세력의 계략에 맞서고 군이 중립을 지켜야 함을 주장했으며 성급한 혼란을 일으키면 군부를 도울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5월 12일, 김대중은 기자회견에서 학생들에게 침착한 대응을 호소했으나, 5월 13일부터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김영삼,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에서 제14대 대통령까지 삶과 업적, 그의 유산

김영삼은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이다. 그는 1929년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나 1954년 만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9선 의원을 지내면서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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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 위협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 계엄을 확대하고 김대중을 체포했습니다. 그 이후 광주에서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김대중의 측근들은 고문을 받았고, 김대중의 아들 김홍일도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김대중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전 세계적인 구명 운동과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1981년 1월 김대중의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1982년, 김대중은 무릎 문제로 정부의 명분으로 미국으로 의료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정치 활동을 금지된 채 2년간 미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1985년, 김대중은 새롭게 결성된 야당을 지원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했지만, 필리핀에서 망명 후 귀국하다 암살당한 베니그노 아키노의 사례로 인해 김대중의 안전 문제가 우려되어 미국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를 무산시키겠다고 압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미국 의원들과 저명 인사들과 함께 귀국하게 되었으며, 도착 후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연금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김대중의 귀국은 신한민주당의 지지를 일으키며 국내 정치 활동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대통령 김대중

1987년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되면서 민주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이에 김대중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김영삼과의 단일화 협상은 무산되고, 결국 김영삼과 결별하여 단독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선거는 지역 간 이권과 예산의 "기득권 싸움" 성격을 띠었으며, 여당(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평민당 국회의원들은 민주화 정국을 주도했으며, 국회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상황이 변하면서 김대중은 단독 개헌선을 넘을 정도로 강해진 슈퍼 여당, 민자당에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라이벌인 노태우에게 패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여당의 인기가 상승하였고, 김대중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 국제적인 중재자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권유하였다. 이로 인해 국내 여론과 클린턴 정부의 주목을 받으며, 중국 방문에서도 권력자를 만나 국빈에 준한 예우를 받았다. 이러한 호의적인 시선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은 김대중은 정계 복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태재단을 설립하고 통일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문화계 인사들과도 자주 만나 이들의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며 호감을 얻었다. 1995년 대한민국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신당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 대선 행보를 시작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대선 캠프를 진행하였고, 김대중은 경제 관련 공부에 매진하며 경제 문제를 다룰 준비를 하였다. 이후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IMF

1998년 3월에 김대중 정부가 취임한 당시 대한민국은 1997년 겨울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인해 전국적으로 위기 상황에 처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 공공부문 감원 등을 통해 경제 구조를 조정하고 IMF의 긴급 자금을 수혈하며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했습니다. 또한 IT와 문화 산업을 장려하고 기업 재무 구조를 개선하는 등 경제 발전을 위한 방안을 시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98년 경제성장률이 -6.9%에서 1999년 9.5%, 2000년 8.5%로 급격히 상승하였으며, 무역 수지도 대규모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또한 2001년에는 IMF 구제 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여 외환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안정적인 경제 정책을 유지하며 경제성장률이 7.2%까지 상승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무인단속카메라를 설치하여 물류비를 줄이는 등 혁신적인 시도도 이루어졌습니다.

남북문제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대북 외교에 노력했습니다. 1998년에는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을 앞세워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남북 경제 협력은 확대되었습니다.

 

2000년 6월 15일에는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들 간에 회담이 열리며,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외교에 대한 노력으로 2000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재임 중에는 대북송금 사건과 같은 논란이 있었으며, 북측의 무력도발도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는 대북 강경정책의 여파로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시기에는 금강산 관광 사건, 서해교전, 천안함 피격침몰사건, 북한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발생하였습니다.

 

오부치 선언

1998년 10월 8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대신이 한 일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과거사 인식을 포함한 11개 항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공동 선언문 부속문서로 5개 분야 43개 항목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행동계획'도 채택한 것입니다. 이 공동선언문으로 일본은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를 문서화하였고, 한일 양국은 정상회담 연 1회 이상 실시, 대북정책 공조, 민관투자촉진협의회 개최, 청소년 교류 확대 등 5개 분야에서 협력해 나가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한일 공동 고등교육 유학생 교류사업이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동선언문은 대중들에게는 주로 '김대중 오부치 선언'으로 불립니다.

 

마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노동자, 민주화 운동가,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199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통일을 추진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시기에도 여전히 북한과의 갈등은 계속되었으며,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남북관계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김대중은 국내외적인 활동을 이어갔으며, 과거의 애환을 풀어나가는 활동도 진행하였습니다. 그는 대통령 시절의 업적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였으며, 그의 사후 명예는 대단히 높이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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