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장군의 삶과 투쟁 : 독립운동가에서 아나키스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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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김좌진 장군의 삶과 투쟁 : 독립운동가에서 아나키스트까지

by InsightMan 2023. 3. 26.

김좌진 장군의 삶과 투쟁: 독립운동가에서 아나키스트까지"는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인물인 김좌진 장군의 모습을 짚어보는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용맹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과 그의 복잡한 이념, 아나키즘을 수용한 과격한 성향에 이르기까지 김좌진 장군의 삶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암살의 배경과 그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소개하며, 이를 통해 그의 업적과 영향력을 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인물인 김좌진 장군의 모습을 짚어보는 글입니다

생애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어릴 때부터 용맹함으로 알려졌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1911년 서간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2년 6개월 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조국 독립을 꿈꾸며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이 되었다. 김좌진은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끌어 일본 군대와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는 반공 노선으로 전환하여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되었다. 김좌진의 유해는 아내 오숙근이 길림성에서 수습하여 충청남도 보령시 선산에 장례하였다. 현재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교육 사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좌진의 아나키즘

김좌진은 대중적으로 반공주의 우익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그의 이념과 행동은 복잡하다. 그는 특정 공산주의 단체와 대립했지만, 다른 공산주의 단체와는 관계가 달랐다.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한 김좌진은 매우 과격한 성향을 보였다. 아나키스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아나키즘의 역사는 비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김좌진은 비판할 때 조선족들에게 언어적 공격을 당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김좌진에 대한 비판이 관대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조선족과 중국공산당은 김좌진을 '조선족 혁명투쟁가'로 찬양하고 있다.

 

 

 

김좌진 암살과 배경

김좌진의 암살은 복잡한 배경이 있어, 단순한 공산주의자들의 암살로만 여겨질 수 없다. 암살자 박상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이자 재중 한인청년동맹원으로, 일부에서는 김일성이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김일성이 당시 18세였고 다른 인물인 김봉환과 혼동되어 있었다.

 

박상실의 실명은 공도진 혹은 이복림이라고 하며,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일본 내무 보고서와 공산당 측의 주장에 따르면, 빈주 사건에 대한 보복이 원인이었다. 서울대학교 신용하 명예교수는 공산단체 '적기단'의 배후설을 주장한다. 김좌진의 후손은 많으며, 그의 서자는 국회의원 김두한이다.

 

김좌진함으로 명명된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이 있고, 증손자 김도현은 육군 병장에서 해군 장교로 임관했다. 일본군의 기밀 자료에 따르면, 김좌진의 키는 약 185cm이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이러한 자료는 일제 기록 속의 김좌진에 대한 중요한 정보로 활용된다.

 

그러나 이 정보가 일본군에 넘어간 것은 충격적인 사실로, 김좌진의 최측근 이정이 일본군에 기밀 자료를 넘겨준 것으로 드러났다. 김좌진의 유품인 은식기는 감정가를 받지 못했으며, 제26신병교육연대의 별칭은 김좌진부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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