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조선건국의 야심가와 이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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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도전 : 조선건국의 야심가와 이상가

by InsightMan 2023. 3. 26.

정도전: 조선 건국의 야심가와 이상가"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정도전의 삶과 정치 철학을 다룬 주제입니다. 이 글은 정도전의 야심과 이상을 탐구하며, 그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그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초기 생애

정도전은 향리 집안 출신으로 봉화 정씨 호족 세력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유명한 선비인 진중길의 사위 최림의 문하에서 기초학문과 시를 배웠고, 이후 합격한 신사년 십운과를 거쳐 고려 정부에서 벼슬을 시작했다. 이숭인, 정몽주, 하륜 등과 함께 유학을 공부하면서 1360년 공민왕 9년 성균시에 급제하였고, 1362년 고려문과 임인방 동진사에 선발인원 중 22등이자 12위로 급제하였다. 다만, 외조모가 노비 출신이어서 출신 성분이 항상 따라 붙었다. 최림이 죽은 후 이제현의 문하로 옮겨서 공부했다.

 

 

젊은 시절

정도전은 젊은 시절에 강직한 성품을 지닌 신진사대부였다. 급제 후에는 젊은 신진파로서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공민왕 시해 이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의 몰락이 일어나는 시기였는데,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을 비판하고 원나라와 단교하며 명나라와 친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권문세족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후 우왕 때 실세이자 친원파 세족이던 이인임의 정책에 반대하여 유배되었으며, 정의롭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복직되지 못한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이인임을 공격하던 동료들은 처형당하지 않으면 복직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부는 변절해서 권신들에게 줄을 선 무리가 있었다. 정도전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후진들을 양성했지만, 학당이 반대 세력에 의해 강제로 박살나는 수모를 겪었다.

 

이 때문에 나라를 뒤엎고 싶어하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황산대첩으로 영웅이 된 북방의 이성계를 만나게 되었다. 이성계가 처음 만난 때부터 이미 야심이 있었다는 추측도 있으며, 이성계가 자기 가문이 처음 세워졌던 곳인 전주로 가서 대풍가를 읊었던 사실도 있다.

 

조선 개국의 역사, 이성계 그리고 정도전

조선 개국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이성계의 등장, 정도전의 정치까지 간략하게 다뤄보겠습니다. 1. 소개: 조선 개국의 역사적 배경 조선 개국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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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내용 자체는 금의환향해서 기분이 좋고 앞으로 휘하 사람들을 잘 뽑아 지내자는 내용이었지만, 배경이 한고조가 천하를 제패하고 나서 고향인 패현에서 친척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이며 부른 상징성이 있는 노래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위치에서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신중해야 했다. 이성계는 당시 역성혁명을 할만한 힘이 없어서 한 개 도에 가까운 지역을 영지로 삼는 대영주일 뿐이었다. 이때 고려 조정에는 이인임, 최영이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가 바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공민왕 시대에는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의 수도와 서북 지역이 털리는 등 상황이 어려웠지만, 여전히 20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내란에서도 6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성계 일가는 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고 있어 자체의 힘만으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동북면, 삭방도, 함길도, 함경도라 불리는 도급 지역 하나의 역량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왕권을 노리기 시작한 것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였고, 노골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은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조민수를 제거한 후인 1390년부터였다. 따라서 정도전의 졸기 내용은 정도전이 남의 힘으로 역성혁명을 하기 위해 물주를 찾아가 본 것이었고, 이성계도 정도전의 인물됨을 본 탐색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이 이후 이성계의 측근 당여가 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일설에는 정몽주가 소개해서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역사에 등장한 정도전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은 조준, 이행, 조민옥 등과 함께 사전 개혁을 주장하였고, 1390년 기존의 모든 토지 문서를 불태워 백성들에게 재분배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개혁 달성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모든 사전 몰수와 노비 해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정몽주 등과의 정쟁에서도 한때 위기에 몰려 유배된 채 살해될 위기까지 당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 이후 이성계의 무한한 신뢰를 받으며 조선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최고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다. 그는 국정 제도 전반을 개혁하고 삼군부를 설치하며 군권을 장악했으며, 천도 계획과 새로운 수도 건설의 모든 것을 주도했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관계 악화와 제3차 요동정벌 계획, 세자 책봉 과정에서의 모순, 사병 혁파 미진 등이 여러모로 타격을 주었고, 그에 대해 학계에서는 요동정벌이 정말로 추진되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죽음

정도전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당하여 사망하였다. 이방원에게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빌었으나 이방원에게 비굴하다며 베어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죄목은 반역을 꾸몄다는 역모죄가 아닌 종친모해죄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끌려갈 때 단검을 쥐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정도전이 끝까지 저항했을 가능성과 최후의 비굴한 모습이 정도전을 비하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도 있었다.

 

 

정도전의 정치 철학

정도전은 민본 정치의 기틀을 닦아 신권 중심 정치 질서를 구상했고, 이를 통해 왕권을 견제하려는 야심가인 이방원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숙청으로 이어졌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 시스템은 재상중심 주의론으로, 학문적 소양을 갖춘 사 계층이 관료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모든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농민에게 균등하게 무상분배하는 민본주의 정치를 이상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비 해방이나 토지 분배 등은 지방 호족이나 향리층 및 관인층의 반발이 극심해 추진하기 어려웠다. 또한 주원장과의 관계에서 정도전은 요동을 선제 공격할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양국 관계는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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